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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차 ]
요즘 폭싹속았수다 인기가 엄청나게 치솟고 있습니다. 드라마를 보다보니 어린시절에 즐거웠던 추억 별거 아니었지만 신났었던 추억들이 생각나서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그 골목에는 이름이 없었다
어린 시절, 내가 가장 자주 머물던 장소는 놀이터도, 학교 운동장도 아니었다. 바로 우리 집 뒤편, 이름조차 없는 그 좁은 골목길이었다. 고양이들이 낮잠을 자고, 할머니들이 작은 의자를 꺼내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곳. 언제나 햇빛이 한 쪽 벽에만 기울어 있었고, 벽돌 사이로 자라는 풀들이 계절을 알려주던 곳. 특별할 것 없는 풍경이었지만, 그곳은 나에게 세계의 중심이었다.
골목은 나와 내 친구들의 비밀기지였다. 때론 작은 돌멩이를 경계 삼아 땅따먹기를 했고, 때론 누구네 집 개가 짖는 걸로 우리들만의 ‘골목 뉴스’를 만들었다. 누구는 자전거를 처음 탔고, 누구는 첫 싸움을 그 골목에서 했다. 그렇게 우리는 하루하루를 골목 위에 쌓았다. 그 시절의 ‘관계’란 조건도 계산도 없었다. 그냥 함께 있다는 이유만으로 친구였고, 그냥 자주 본다는 이유만으로 속마음을 털어놨다.
그 골목에는 이름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의 발자국, 웃음, 울음, 계절의 숨결들이 그곳에 이름 대신 이야기를 남겼다. 돌이켜보면 그곳이 바로 ‘관계의 연습장’이 아니었을까. 익숙함 속에서 서로를 받아들이고, 때론 부딪히며, 다시 어울리는 그 과정 속에 인간관계의 기초가 있었다. 무언가를 잘하려 하기보단 그냥 있는 그대로 머무는 법을 배운 곳. 지금의 내가 종종 잊고 사는 ‘편안한 연결’의 감각이, 그 골목엔 늘 있었다.
어린 시절의 관계는 ‘있는 그대로’였다
골목길에서 맺었던 관계들은 참 단순했다. 누가 잘났느니, 누가 더 많은 걸 가졌느니 따지지 않았다. 그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똑같이 먼지 묻히며 놀던 사이. 약속 없이 만나고, 금방 삐지고, 다시 웃으며 화해하던 그 관계의 순수함. 요즘의 관계들이 왠지 모르게 어려워진 지금, 그 단순함이 가끔 그립다.
지금의 나는 관계를 맺을 때 조금 더 조심스럽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해야 할지, 혹시 부담을 주진 않을지.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안 되는 묘한 거리감 안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쓴다. 그리고 문득, 그런 계산 속에서 진짜 마음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 때는 ‘나’라는 사람을 있는 그대로 내보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어설퍼도, 말이 거칠어도, 내 감정 그대로를 드러내도 상대가 받아주는 믿음이 있었다. 지금은 어쩐지 ‘보여지는 나’를 먼저 의식하게 된다. 무심코 던진 말 하나에 스스로 괜히 상처받기도 하고, 상대의 반응에 민감해져 괜히 선을 긋기도 한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오히려 말수가 줄어드는 이상한 아이러니 속에 있다.
물론 나이 들며 생기는 사회적인 역할이나 책임, 상처의 기억들도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골목에서 배운 ‘자연스러운 연결’이 지금의 나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생각도 든다. 때로는 거창한 배려보다, 그냥 옆에 있어주는 게 더 큰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그 골목길에서 배운 관계의 방식을 가끔은 꺼내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의 나에게 골목은 어디에 있을까
이제는 더 이상 그 골목에 가지 않는다. 동네는 재개발로 사라졌고, 그 자리에 높은 아파트가 들어섰다. 언젠가 찾아가봤을 때, 낯선 풍경에 마음이 멍해졌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골목의 모습은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에 또렷하다. 어릴 적의 내가, 그리고 친구들이 아직도 그곳 어딘가에서 장난치고 있는 것만 같다.
가끔 생각한다. 지금의 나에게도 그런 ‘골목’ 같은 공간이 있을까. 편안하게 감정을 털어놓고,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 있는 곳. 말하지 않아도 함께 있는 것만으로 안심되는 사람들. 그런 공간이나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소중한지, 어릴 땐 몰랐는데 이제야 조금씩 깨닫는다.
그래서 요즘은 그런 골목을 ‘만들어보려’ 한다. 누군가에게 내가 그런 골목이 되어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도 진심이 숨지 않도록, 애써 포장하지 않아도 되는 그런 존재로 남고 싶다. 아주 작은 모임에서도, 짧은 대화에서도, 서로에게 편안한 온기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건 어쩌면 어릴 적 그 골목이 내게 해준 역할일지도 모르겠다.
기억의 조각을 따라가다 보니, 나는 다시 그 골목에 서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처음으로 관계를 배우고, 함께함의 가치를 느꼈다. 이제 그 골목은 사라졌지만, 그 시절의 감각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관계에서도 그 감각을 잃지 않기를, 그때처럼 자연스럽게, 나와 타인을 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